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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CTS
작성일시 : 2007-07-17
조회 :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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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S기획보도 ‘열사의 길을 가다’ 오늘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또 세계평화와 자유를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를 찾았던 이준열사의 행적을 따라가봤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양화수 기자의 보돕니다.
고종황제로부터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라는 밀명을 받은 이준. 감리교인이자 상동교회 집사였던 그는 이 사실을 전덕기 담임목사에게 알리고, 전 목사의 기도와 격려에 힘입어 만국평화회담이 열리던 네델란드 헤이그로 출발합니다. 1907년 7월. 네델란드 헤이그 HS역에서 이상준, 이위용을 만난 이준은 도착 즉시, 만국평화회담이 열리던 헤이그 비넨호프로 이동합니다. 12번째 정식초청국의 자격으로 회담 참석을 요청했지만, 일본의 압력과 방해에 못이긴 열강들은 이들의 참석을 거부했고, 세 명의 밀사는 회담장 앞에서 현지 기자들을 통해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SOT 신경하 감독회장 // 기독교대한감리회 “이 문이 닫히고 못 들어갔을 때, 그 마음에 분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1907년 7월 14일. 이준 열사가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3평 남짓 차가운 호텔방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입니다. 혹자는 ‘질병’으로, 혹은 분통함을 못 이겨 ‘자결했다’라는 주장도 했지만, 사인을 떠나 이준 열사의 죽음은 그 자체로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남겼고, 이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제2차 항일의병항쟁의 촉발제가 됐습니다. SOT 신경하 감독회장 // 기독교대한감리회 “이 준 열사의 정신을 잘 이어가는 그런 다짐들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1963년. 이준열사의 시신은 독립한 조국,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준열사가 서거한지 56년이나 흐른 뒤였습니다. SOT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머나먼 타향에서 생을 마감한 이준열사. 그 숭고한 죽음의 의미는 아직도 이곳 헤이그에 면면이 흐리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CTS양화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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